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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2019 신년이벤트 '시 읽어주는 영화관' 선정된 12편의 시 공개!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달같이

 

윤동주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나간다.

 

램프와  빵

- 겨울 版畵 

 

기형도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벌레  먹은  나뭇잎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윤동주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앖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이상국

 

큰 산이 작은 산을 업고

놀빛 속을 걸어 미시령을 넘어간 뒤

별은 얼마나 먼 곳에서 오는지

 

처음엔 옛사랑처럼 희미하게 보이다가

울산바위가 푸른 어둠에 잠기고 나면

너는 수줍은 듯 반짝이기 시작한다

 

별에서는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별을 닦으면 캄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별을 쳐다보면 눈물이 떨어진다

 

세상의 모든 어두움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다

 

만약에 내가

 

에밀리 디킨슨

 

만약에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만약에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제 둥지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지금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적어주신 시가 선정된 분께는 개별 연락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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