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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영화학교는 예술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진지한 영화 감상과 영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장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정기적으로 마련하고 있는 영화 강좌 프로그램입니다.

[2016 모모 영화학교] 네오리얼리즘: 새로운 영화의 탄생, 6강) 네오리얼리즘에서 모던 시네마로, 혹은 그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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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좀 더 멀리 나아가서 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여러분들과 나누는 시간이 될 것.”

정성일 평론가는 네오리얼리즘 영화학교의 마지막 강의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에 대한 수업의 포문을 이렇게 열었다. 그는 로셀리니가 가진 이름의 층위가 다층적이라면서 네 가지 층위로 그것을 설명하였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란 이름의 네 가지 층위

 

네 가지 층위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첫 번째 이름, 두 번째는 잉그리트 버그만과의 이른 바 ‘세기의 스캔들’, 세 번째는 모던 시네마의 첫 시작, 네 번째는 미학으로서의 시네마, 미학으로서의 텔레비전의 관계를 새로 모색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특히 ‘심각한 시네필’이라면 로셀리니라는 이름을 세 번째 층위로서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잉그리트 버그만과의 4부작 걸작 중 <이탈리아 여행>은 까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 비평가들에게서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이후 안토니오니, 파졸리니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모던 시네마의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단서가 되는 것이 들뢰즈가 쓴 두 권의 책인데, 시네마1 운동-이미지, 시네마2 시간-이미지에서 두 번째 책인 시간-이미지가 로셀리니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에 그는 주목했다.


이 층위에 대해 언급한 후, 정성일 평론가는 로셀리니에 대해 짧은 평을 덧붙였다. “로셀리니는 고다르보다 위대하다. 로셀리니가 없었으면 고다르가 없었다.”라고. 또한 그는 “평론가로서 로셀리니를 말하는 것이 두려운 순간이다.”라고도 말했다. 요새의 140자 트윗과 같이 그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면서 당시 기자였던 자크 리베트와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 <이탈리아 여행>을 찍은 후 로셀리니와 로마에서 진행한 인터뷰 일화를 소개했다. 리베트와 트뤼포가 로셀리니를 만나 로셀리니에게 감독이 생각하는 리얼리즘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로셀리니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영화에서 리얼리즘은 도덕의 문제이다.” 후에 리베트는 이 인터뷰를 회자하며 “이 대답을 듣기 전과 들은 후가 있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인터뷰 일화를 이야기 하며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에서 세상의 중심을 건드리는 문제가 미학이나 정치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라고 말할 때 영화 미학은 영화 존재의 근거 대한 근본적 질문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벨바그의 아버지는 장 르누아르가 맞고 프랑스 영화 전통에서 설명하는 것이 맞지만 르누아르에서 누벨바그로 바로 점핑이 되지 않는데 이 사이에 있는 것이 로셀리니라고 설명했다. 로셀리니가 없었다면 누벨바그로 건너가지 못했을 것이며, 누벨바그 감독들은 르누아르와 로셀리니를 경유하여 영화를 혁신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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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사와 로셀리니
정성일 평론가는 본격적으로 로셀리니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 ‘상황의 영화’였기 때문에 그가 살았던 시대적 조건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탈리아의 역사와 그 역사 안의 로셀리니와 그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1906년 5월 8일 로마에서 태어나 1977년에 죽을 때까지 로셀리니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가 로마의 근현대사를 평생 직면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말 이탈리아는 유럽의 다른 나라와 달리 식민지를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만들려다가 패배한 치욕의 역사를 가졌으며, 이 일로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약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란 오명을 얻었다. 1차 세계대전 오스트리아, 독일과 함께 삼국동맹의 당사자였던 이탈리아는 패색이 짙자 연합군과 손을 잡고 전쟁에 참여했지만 종전 후 승전국으로서 전리품을 얻지 못한다. 이때 권리를 받을 수 없다는 모멸감과 유럽국들에 대한 적개심이 파시즘이 시작될 토양을 만들었다. 이런 토양으로서의 이탈리아 로마인의 감정을 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치하에서 로셀리니는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다. 이때 무솔리니는 크로체와 함께 로셀리니에게 중요한 사람이 된다. 크로체는 교양으로서 중요한 사람이며, 무솔리니는 역사로 중요한 사람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후 무솔리니에 대해 비중 있게 설명했다. 무솔리니 전기 작가의 공통된 의견은 “유일한 일관성이 있다면 평생 일관성이 없다는 것”인데 무솔리니는 아버지 영향 하에 사회주의자로 시작하지만, 군복무를 마친 후 극우파로 변절한다. 로셀리니가 8살이던 무렵, 극우파들은 테러집단에 기꺼이 돈을 바쳤다. 정치적 아수라장 속에서 2대째 건축 설계사로 유명했던 조부와 아버지 아래에서 로셀리니는 유복하게 지냈다.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로셀리니에게 아버지가 아파트를 전세내서 차려준 실험작업실에서 마음껏 공상하며 지낼 수 있었다.

무솔리니는 ‘파쇼 이탈리아 전투자 동맹(Il 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를 조직하여 노동조합을 파괴하면서 자본가들에게 돈을 받는다. 또한 1921년 로마로 입성하여 국가 파시스트 내각을 수립하게 된다. 정권을 장악한 국가 파시스트당은 자본가, 가톨릭 등을 모두의 인정한 상태에서 그들의 재정적 지원 하에 국민을 악의적으로 교육·학습하는데 국민 선동을 당의 전술로 삼았다. 무솔리니는 문화를 사랑하는 정치가들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초의 국제 영화제인 베니스 영화제를 열게 된다. 이때 당시 영화 비평가이자 기자였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이 영화제를 취재하러 간다. 안토니오니는 영화제를 관찰하면서 영화제에서 파시즘을 느끼게 된다. 영화제의 공기 자체를 파시즘이라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영화로 비가시적인 것을 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느낀다. 안토니오니의 각성의 순간이 네오리얼리즘의 태어나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정성일 평론가는 설명했다.

로셀리니의 영화들(1) :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 시기

정성일 평론가는 로셀리니가 시네필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로셀리니의 핵심으로 꼽았다. 로셀리니는 영화에 매혹된 것이 아니라 카메라에 매혹되었다는 것이다. 로셀리니는 카메라의 존재를 믿었다. 영화를 찍는 태도를 “시네마틱한 광경을 찍겠다”는 것과 “카메라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두 가지로 나눌 때 로셀리니는 후자라는 것이다. 카메라가 어떻게 자기의 존재를 증명할 것인가가 중요했던 사람이라는 것. 로셀리니는 독학으로 카메라를 익혀가기 시작했다.

​- 첫 장편 <하얀배>(1941)
로셀리니가 찍은 첫 장편 <하얀배>는 베니스 영화제에 나가 호평을 받지만, 베니스 영화제는 관제 영화제였기 때문에, 파시스트 관제 영화라는 오명을 받게 된다. 당시에 무솔리니는 독일과 소련의 전쟁에서 독일에 10만명의 군인을 보태는데 러시아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독일과 이탈리아 연합군은 전멸했다. 전쟁 상황에서 영화를 찍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영화를 찍는 것이 가능했을까’라는 질문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시작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은 현실이란 토대 없이 만들어질 수 없었던 사조이다. 그것은 누벨바그와 알제리전, 아메리카 뉴시네마와 베트남전이 긴밀하게 연관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던 방식의 예술인데 그것은 바로 “영화는 과정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 현실이라는 세계 안의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시작한 사람들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 세 번째 영화 <십자가의 사나이>(1943)
로셀리니가 이 영화를 찍을 때 시칠리아에 미군이 도착한다. 무솔리니는 내각에서 해임되어 감옥에 감금되는데 무솔리니와 동맹을 맺었던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해 무솔리니를 감옥에서 구한 후 살로 공화국으로 보내고 독일이 이탈리아를 점령한다. 로마 시민들은 동맹국이 나라를 점령했다는 이유로 독일에 적대적이 된다.

- 다섯 번째 영화 <무방비 도시>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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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셀리니는 네 번째 영화를 찍다가 중단하고 필름이 남은 김에 다섯 번째 영화 <무방비 도시>의 인서트를 찍는다. 영화의 풍경, 세상의 광경 인서트로 로마를 찍어나간다. 미로와 같은 도시 로마였지만 평생을 로마에서 산 로셀리니는 어디서 찍어야 할지 너무도 잘 알았고, 이 과정에서 로셀리니는 새로운 영화의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 바로 인서트가 영화의 줄거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전쟁 상황이던 당시 사회를 전쟁 영화로 기대하고 찍었으나, 막상 영화 속 쇼트의 이미지의 현실, 이미지의 사건이, 장면 하나하나가 사건이 되었고 이를 통해 로셀리니는 인서트들이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정성일 평론가에 따르면 로셀리니는 영화 속 장면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순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따라서 로셀리니를 영화가 요구하는 것을 승복한 최초의 감독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로셀리니의 태도로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홍상수를 언급했다.

- 여섯 번째 영화 <전화의 저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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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는 서로 완전히 다른 방법론으로 찍혀 옴니버스 영화로는 보이지 않는다. 로셀리니는 하나의 사건과 역사에 대해 7가지 방법론으로 다면체와 같이 영화를 찍어내는데, 앙드레 바쟁은 이 영화에서 가능성을 보았다고 한다. <전화의 저편>의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서 총살형 당하는 빨치산을 구경하듯이 찍었는데, 모든 파토스를 다 버리고 처형을 바라보는 이 광경을 ‘관점이 없다’고 평하는 대부분의 평자와는 달리, 앙드레 바쟁은 로셀리니 이전까지는 영화가 사건 · 인물을 만나는 것이 핵심이었다면, 로셀리니 이후 영화 자체가 대상과 만나는 것으로 위상이 옮겨졌다고 주장했다. 로셀리니는 영화와 사건이 만났을 때 영화에 무슨 일이 생기는가를 질문했고, 그래서 앞서 적었듯 리얼리즘을 도덕의 문제로 언급했던 것이다.

​- 이 시기 로셀리니의 영화 미학 

​정성일 평론가는 로셀리니의 가장 중요한 점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로셀리니를 통해 영화는 운 좋게 ‘모더니즘 = 리얼리즘’인 상태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다른 예술의 경우 예컨대 문학만 하더라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은 대립 양상을 띠었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셀리니의 영화를 본 미학자들은 로셀리니가 영화의 시청각 기호들을 독립시키는 것을 해냈다고 여겼다. 로셀리니는 눈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불일치를 존중했으며, 청각과 시각을 분리하였다. 로셀리니는 어제 만난 이미지가 오늘 만난 이미지와 같지 않다고 여겼으며, 이미지는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로셀리니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이미지 사실로서의 카메라에 포착된 것은 사실에 충실할수록 그 사실에 초과되는 무엇을 찍는다는 것이었으며, 로셀리니는 영화의 마술이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로셀리니는 이탈리아 국민 3명 중 1명이 공산당원인 당대에 단 한 번도 공산당원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로셀리니는 평생 가톨릭 신자였으며, 영성을 믿고 끝까지 개인주의자와 형식주의자로 남았다. 로셀리니는 ‘우연’으로 <무방비 도시>를 찍었으며, ‘기다림’으로 <전화의 저편>을 찍었다. 로셀리니는 “영화에서 기다림보다 나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없다.”라고 할 정도로 ‘기다림’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때 로셀리니가 ‘무엇을’ 기다리느냐는 틀린 질문이다. 로셀리니는 기다림의 끝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21세기에 지아장커는 로셀리니에 대해 “그의 영화는 기다리고 찍었고, 기다림을 찍고 있었다.”라고 언급했으며, 그 또한 시간을 물쓰듯 쓰면서 기다림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로셀리니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지아장커는 <무방비 도시>, <전화의 저편> 시기의 로셀리니의 후계자라고 볼 수 있다. 많은 비평들이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에 지면을 바친다. 로셀리니는 자신의 방법을 더 밀고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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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영년>에 비평가들이 당황하는 이유는 로셀리니가 상징적으로 찍는 것을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이 영화가 상징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셀리니의 연출이 성숙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영화 이론가들은 ‘네오리얼리즘의 핵심은 진실을 포착하는 것’이라며 방법론을 정식화했는데, 이때 로셀리니는 ‘이 생각에 완전히 동의하지만 이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진실을 포착하기 위한 도덕적 위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라면서 “이해할 만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리얼리즘 논쟁의 중심에 끌려왔을 때, 로셀리니는 주제 중심의 리얼리즘을 거부했다. 영화 안에 있는 대상이 물 자체가 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데, 이것을 정성일 평론가는 ‘그것이 거기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라고 설명했다. 영화는 순간을 찍을 수 있고, 이 순간이란 것은 ‘사진’은 찍을 수 없는 ‘시간’이다. 영화는 ‘시간’을 찍기 때문에 세계의 미스테리를 보존하여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셀리니의 영화들(2) : 잉그리드 버그만 4부작 시기 

​1948년 5월 8일 오후 1시 로셀리니 사무실에 잉그리드 버그만에게서 전보가 도착한다. 헐리우드에서 대단한 스타 배우였던 잉그리드 버그만이 로셀리니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성일 평론가는 ‘박찬욱 감독에게 니콜 키드먼이 사랑 고백 메일을 쓴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가톨릭 사회였기 때문에 둘을 인정하지 않았고, 로셀리니는 ‘창작력이 떨어지니 스캔들로 간다’는 야유를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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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버그만과의 스캔들과 상관없이 로셀리니의 영화는 한 단계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사이트앤사운드지>에 자신이 꼽은 10편의 영화에 로셀리니의 이 시기 작품인 <스트롬볼리>가 들어간다고 말했다. 4부작을 찍은 기간은 1949년에서 1954년으로,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시점까지이다. 

 

​- 이탈리아 여행<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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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에 빠진 부부가 나폴리를 여행하는 내용의 이 영화는 까이에 뒤 시네마를 쇼크 상태로 만든다. 주인공인 캐서린과 알렉산더가 두 배우의 멜로 드라마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찍히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게 이 영화에는 플롯이 없다. 마지막 장면이 특히 당황스러운데 부부는 종교 행렬과 마주치고, 잡았던 손을 놓친 알렉산더와 캐서린 부부를 영화는 놓쳐버리고, 종교 행렬 속 어린 아이를 바라보며 영화가 끝난다. 이것은 현실의 상황이 만든 조건으로, 드라마로 시작한 영화가 현실에서 머물면서 끝난다. 이 영화의 방법론은 로셀리니의 귀환이라 불리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와 연결이 된다. 

 

<이탈리아 여행>이 메타 영화에 가까워지면서 로셀리니는 일반 관객에게 너무 생소해진다. 미학적 성취와는 달리 로셀리니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로셀리니의 영화는 젊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고, 대표적으로 누벨바그 감독들은 로셀리니 성취의 한 끝자락을 붙잡은 후 그것을 뛰어넘는 성취를 보여주게 된다.

 

​로셀리니의 영화들(3) - TV 시리즈 시기 

​이후 로셀리니는 TV에 관심을 돌린다. TV가 미래의 시네마가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로셀리니는 미래의 영화가 점점 더 가벼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론이 분분하게 갈리지만 이 시기의 로셀리니 영화야말로 성숙한 영화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이 시기의 전기 영화로는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사도행전>, <소크라테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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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평론가는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에 대해 주로 설명했다. 이 영화는 루이 14세에 관심이 없다. 권력 쟁취 과정에만 관심이 있다. 그 과정에 대해서, 힘의 균형에 대해서 찍고 있다.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과정 속에서 이미 썩어 들어가는 상부구조의 과정을 보여줄 때 이미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싹트는 것 자체를 영화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130년 후의 프랑스 대혁명은 찍을 필요가 없다. 이미 루이 14세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셀리니는 그 과정 속 프랑스 대혁명을 찍기 위해서 광경에만 집중한다.

 

로셀리니가 이 영화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스펙터클과 재현이다. 제임스 로이 맥빈 평론가는 이를 “유물론적 미장센”이라고 말하며 이 시기 로셀리니 영화를 하나의 영화의 씬이 하나의 사회 구성체를 이룬다고 보았다고 했다.

 

정성일 평론가는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를 끝으로 로셀리니의 성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했다. 그에 따르면 로셀리니는 수많은 길을 열어준 첫 출발점이며, 로셀리니가 명백히 고다르보다 위대하다.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에는 드라마는 없고 에피소드만 있다. 로셀리니의 미학적 목표는 드라마를 필사적으로 피하는 것이며, 그는 이 영화에서 디테일의 미장센을 구사했다. 디테일과 데드타임을 결합하면서 미장센을 구성해 줄거리를 피해가면서도 에피소드를 구성할 수 있었다. 드라마를 필사적으로 피하는 것이 그의 영화적 목표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과정(프로세스)이다. 이것을 로셀리니는 역사를 찍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비가시적인 시간을 찍는 방법. 이 방법을 배운 것이 허우 샤오시엔이다. <해상화>, <희몽인생>은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를 찍은 방식으로 찍어나간 작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로셀리니는 자기가 찍은 영화의 의미를 생산하지 않으려 필사적이었다고 말했다. 로셀리니에게 영화는 ‘현전’하는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찍고 난 후 인터뷰에서의 로셀리니의 마지막 전언을 전하며 정성일 평론가는 3시간을 꽉 채운 열강을 마쳤다.

 

“역사적 시간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나는 나무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나무가 거기 있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때 당신은 무엇이 필연적인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로셀리니에 관한 글에서 인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매 시기별로 달라졌던 로셀리니의 영화 행보에, 또한 영화의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준 로셀리니의 영화 인생 자체에 강의 내내 존경을 표하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그는 첫 영화 <카페 느와르>를 만들면서 마음 속으로 기준을 삼은 감독으로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꼽은 바 있다. (씨네21, "평론가는 내 정체성, 감독은 삶의 목표"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65886) 모던 시네마의 수많은 가능성을 제시했던 로베르트 로셀리니를 끝으로 2016 모모 영화학교 네오리얼리즘 강의가 종료되었다.

 

글: 모모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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