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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영화학교는 예술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진지한 영화 감상과 영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장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정기적으로 마련하고 있는 영화 강좌 프로그램입니다.

[2017 모모 영화학교] 다시 만난 세계: 뉴아메리칸시네마 6강) 클린트 이스트우드드_서부 사나이의 완보(緩步)

클린트 이스트유드: 서부 사나이의 완보(緩步)

11월 30일(목) ㅣ 허문영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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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 영화평론가

 

 

허문영 평론가는 자신이 맡게 된 영화학교 두 번째 강의의 포문을, 이전 강의에서 다루었던 감독스티븐 스필버그와 본 강의에서 다룰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공통점으로 열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 평론계에서도 이들에 대한 평가는 매우 잠정적이다. 이는 예술가적 자의식으로 영화를 만들기 보다는 메이저 영화사와 매우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영화를 만들어온 그들의 이력에서 기인한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에서 이스트우드만의 개성을 꼬집어 내기 어려운 것은 사실 그의 영화 연출의 노선이 감독의 개성만을 전면에 부각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스트우드는 감독으로서 구사할 수 있는 연출적 전략들을 관객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연기자와 시나리오를 공경하고, 그 모든 것이 달려있는 ‘이야기’ 자체에 집중한다.

더불어 그는 특정 관념에 구애 받지 않고 영화를 지휘한다. 특히 영화를 찍을 때 제작비와 제작기간을 절대 초과하지 않고 가장 경제적으로 영화를 찍는다. 편집 때 버릴 장면이 없이 영화를 찍는 이 연출의 단조로움은, 어떤 지점에서 다른 요소들과 결합될 시, 오히려 풍부한 연출을 통해 제작되는 영화들보다 더욱 충만한 감흥을 자아낸다.

 

도식적으로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설명하자면 두 가지 방식이 가능하다고 허문영 평론가는 설명한다. 하나는 주제 면에 있어서 ‘운명과 의지의 교접’이며, 다른 하나는 형식 면에 있어서 ‘완보와 주저’가 보인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스트우드 영화는 고유한 스타일이랄 게 없으나, 은밀하고 기저에 깔린 형식 정도는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완보와 주저라고 허문영 평론가는 이야기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가 발표되고 모든 상을 휩쓸면서,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폭력적 싸구려 액션이 아니라 미국 서부 고전극의 폭력성에 대한 명상적 고찰을 담았다는 평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오해에 가깝다. 이스트우드는 윤리적 고민을 하는 인물이 아니고, 따라서 그의 영화는 윤리와 도덕, 서부세계 또는 영웅과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담지 않는다. 그는 서부극에 출연하고 서부극을 만들어왔던 자신의 영화 기록들에 대한 고민을 한 것뿐이다.

이러한 고민은 그의 영화 속 주인공의 대사로서 표출된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나는 왕년에 여자든 아이든 닥치는 대로 죽였다”라는 대사는 서부극에서 미국적 영웅을 만들기 위해 자행해왔던 폭력성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영화 속 연출에 대한 평가이다. 즉, 배우로서의 이력과 감독으로서의 이력이 본인 영화에 끊임없이 새겨진다는 점이 아주 특별한, 감독적 특성에 기인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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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우드의 영화는 포스트 서부극으로 분류될 수 있다. 공동체와 영웅의 긴장과 협력을 다루며 옛 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다룬 전통적 서부극과는 다르게, 그의 서부극에는 공동체가 없고, 그저 개인일 뿐인 영웅만이 있으며, 그에게는 복수나 명예 등 개인적 목적의식은 있으나 공동체에 대한 감각은 부재한다. 이스트우드의 정치적 성향인 리버테리언(자유의지론자)의 태도가 그의 영화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리버테리언들은 ‘나’를 규제하려 드는 그 모든 것을 적으로 설정하며, 따라서 현존하는 모든 정당 중 그 어떤 한 노선에도 환원될 수 없고, 만약 어느 한 정당을 지지한다면 그것은 그 정당 자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당이 ‘나’를 제일 덜 규제하려 들기 때문인, 철저한 독단주의자들이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곧 타자를 마주보는 태도와 직결된다. 이스트우드가 ‘타자’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그의 영화 <무법자 조시 웨일즈>에 나온다. 이 영화 인디언은, 통상의 서부극이 인디언을 ‘나와 내 국가’의 적군으로 그려내는 것과 달리 오히려 정부나 시스템보다 나와 더 가까운 이들로 규정된다.

 

편집 시 버릴 장면 없이 영화를 찍는 이스트우드의 경제성은 곧 연출의 단조로움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오히려 풍부한 연출을 통해 제작되는 영화들보다 충만한 감흥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랜 토리노>에는 초반 5분 동안 동양인들이 본인들끼리 파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영화 전체의 서사를 진행하는 데에는 필요치 않은 잉여적인 부분이다. 영화는 곤경에 처한 동양인을 물리적으로 우월한 백인이 구해줌으로써 정서적 연대를 나눈다는 서사이며, 이는 힘과 윤리에서의 백인의 우위를 전제하는 구태의연한 소재이다.

그러나 이런 틀에 박힌 백인우월적 주제를 말할 때 이스트우드는 동양인들의 행복과 웃음을 긴 시간 공을 들여 굳이 담아낸다. 구태의연한 소재를 선택하더라도 이스트우드는 기꺼이 서사적 잉여인 장면을 투입함으로써 영화는 감각적 균형이 맞춰지며, 이 균형은 매우 큰 윤리적 감동을 자아낸다. 동양과 서양이 모두 등장하는 서사는 어느 한 쪽, 특히 서양만의 목소리로 전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트우드 개인의 의지이며, 이러한 의지는 영화에 분명 반영된다.

 

세상 어느 천지에도 같은 소재를 가지고 두 번 말하는 감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기꺼이 두 번 지휘봉을 든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모두 같은 전쟁을 다룬다. 전자는 미군의 시점으로 제작된 영화이고, 후자는 일본군의 시점이다. 각각의 영화 자체도 영화적으로 매우 훌륭하지만, 이 두 편의 영화를 병렬하여 감상하는 체험은 아주 큰 감동을 준다.

이스트우드는 <아버지의 깃발>에서 일본군에게 전쟁의 패자로서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말할 기회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에 일본군을 오직 시체로만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 기회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새롭게 부여된다. 이스트우드는 온몸으로 “’나’는 타자에 대해 발언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타자 그들은 ‘나’에게서는 비록 타자이나 스스로에게는 언제나 주체일 것이며, 내가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주체로서 본인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이스트우드는 본인의 영화적 행보로서 피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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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완보와 주저’의 형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허문영 평론가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가져온다. 이 영화의 공기는 기이하게도 희박하다. 그 희박함의 정체란 인물에게 깊이가 부재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 영화에는 살인과 섹스라는 분명 긴박감을 가져올 수 있는 소재가 등장하지만, 이스트우드는 그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건조하게 그려낸다.

영화의 줄거리는 인기 지방 DJ인 주인공에게 스토커가 “Play ‘Misty’ for me.”라고 전화를 거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집착이 정도를 넘어 연인을 다치게 한 스토커를 주인공이 처단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스토커를 처리하는 방법은 피의 복수극이 아니라 그저 주먹 한 방이다. 마치 B급 영화처럼 스토커는 한 방에 나가 떨어져 창을 깨고 절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주인공이 다친 연인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카메라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라디오에서 “Misty를 신청하신 분을 위해 들려드립니다”라는 대사가 흘러나오고, 카메라는 창 너머 널부러진 스토커를 담는다. 아주 기괴한 상황이다. 모든 풍파가 멎은 연인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그려낸 통상적인 결말이 아니다. 이는 기존의 멜로드라마에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이상한 이 카메라 워크가 바로 완보와 주저를 나타낸다. ‘완보’라는 것은 그저 느린 페이스, 즉 민첩함이라는 긍정성에 대한 마이너스가 아니다. 다만 도달점에 친절하게 다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이해에 필요한 장면들을 삭제하고 관객들이 멍한 상태를 유지하게 만든다. 절정의 순간에 감각적 쾌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관객들이 감각적 흥분의 부재를 체험함으로써 기존의 문명적 기괴함을 인지하고 그 가치를 공유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감독으로서, 또 배우로서 자신의 영화에 자신의 육체를 새겨왔다고 허문영 평론가는 말한다. 운명과 의지의 교접이라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그랜 토리노>나 <설리>와 같은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이기에, 이스트우드가 지난 미국 대선에서 보인 행보는 매우 충격적이다. 예술의 훌륭함이 예술가의 인간성을 담보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허문영은 그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스트우드의 걸작선을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버드>, <미드나잇 가든>으로 꼽으며, 이스트우드는 한 문장으로 정의될 수는 없으나 분명 유의미한 분석 지점이 존재하는 감독임을 다시금 설명하며 강의를 마쳤다.

 

정리. 이유진 모모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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