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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영화학교는 예술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진지한 영화 감상과 영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장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정기적으로 마련하고 있는 영화 강좌 프로그램입니다.

[2017 모모 영화학교] 다시 만난 세계: 뉴아메리칸시네마 8강) 데이빗 린치_Fire Talk with me

데이빗 린치: Fire Talk with me

12월 14일(목) ㅣ 정성일 영화감독ㅣ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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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세계: 뉴 아메리칸 시네마 그 마지막 시간은 데이빗 린치 감독에 대해 전기(biography)적으로 접근하는 정성일 평론가의 강의가 이어졌다. 앞서 여러 뉴 아메리칸 시네마 감독에 대해 다뤘지만 데이빗 린치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는 통상적인 영화의 경향 속에서 규정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데이빗 린치는 긴 시간 작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그 작업의 중간에 여러 변곡점이 존재하는 감독이기에 그를 단순히 한 줄로 정의하기보다는 “데이빗 린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데이빗 린치의 예술적 여정을 따라가보는게 좋겠다.

 

데이빗 린치의 예술적 여정 중 맞이한 네 번의 전환점

 

열다섯 살의 데이빗 린치, 토비 킬러(Toby Keeler)와 

그의 아버지 부쉬넬 킬러(bushnell Keeler)를 만나다.

 

1961년, 열다섯 살이었던 데이빗 린치는 당시 교제하던 버지니아라는 여자친구를 통해 토비 킬러를 소개받는다. 토비 킬러의 아버지 부쉬넬 킬러는 화가였으며 아들이 데려온 데이빗 린치에게 자신의 작업장을 구경시켜준다. 부쉬넬 킬러는 그림에 관심을 보이는 데이빗 린치에게 “너도 미술에 관심 있니?”라고 묻자, 데이빗 린치는 “네. 저는 평생 그림을 그려보고 싶습니다.”라고 얘기한다. 이후 부쉬넬 킬러는 데이빗 린치에게 로버트 헨리(Robert Henri, 화가)의 책을 선물했고 그 책 속에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조지 벨로스(George Bellows) 등 여러 화가의 그림 및 소개가 담겨있었다. 그중에서도 데이빗 린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삶을 위한 예술”이라는 한 문장이었다. 일반적으로 “예술을 위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와 대조적인 문장에 데이빗 린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열다섯의 소년 데이빗 린치는 이 문장으로 자신의 삶을 정식화(定式化: 일정한 공식과 같이 일정한 명제나 정의로 규정됨. 또는 그렇게 규정함) 했으며 자신의 일기장에 “Art Life”라고 적었다는 일화가 있다. 데이빗 린치는 이처럼 이른 시기에 자신의 삶의 좌표를 설정했고 그 좌표에 걸맞는 “Art Life”를 살아가고 있다.

 

대학 시절의 데이빗 린치, 평생 안고 갈 삶의 질문을 떠올리다.

 

1960년대 미국은 베트남전의 발발, 그로 인한 반전운동과 인권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데이빗 린치는 사회운동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고 학교(Pennsylvania Academy of the Fine Arts) 생활과 그림에만 몰두했다. 어느 날 오후, 데이빗 린치는 자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유화로 덧칠하고 또 덧칠하다 캔버스가 거의 까맣게 될 정도로 덧칠했다. 데이빗 린치는 까맣게 된 캔버스 앞에 멍하니 서있다가 문득 캔버스 앞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걸 느낀다. 그 순간, 데이빗 린치는 ‘그림이 움직일 수 있다면?’, ‘그림이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이라는 평생 안고 갈 삶의 질문을 떠올렸다. 이는 데이빗 린치에게 도약의 순간이 되었고, 이후 캔버스를 치워버리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화가에서 영화감독이 된 경우 그림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으나 데이빗 린치는 영화감독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영화감독이라 불리는 것보다 화가라 불리는 것을 선호했다. 데이빗 린치는 영화를 그림 작업의 연장선이라 생각했고, <인랜드 엠파이어> 촬영 당시 사용했던 소니 PD-150 카메라에 대해 자신의 새로운 붓이라 칭하기도 했다. 데이빗 린치는 위와 같은 질문을 바탕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맹렬히 밀어붙이며 여전히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감독이다.

 

<이레이저 헤드(Eraserhead)>, 1997년 作 촬영 및 그 과정에서 겪은 고난, 

그리고 초월명상

 

1973년, 데이빗 린치는 자신의 첫 장편 <이레이저 헤드> 촬영을 시작했으나 계속되는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혔다. 이 시기는 데이빗 린치에게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되며 계속되는 문제로 인해 결국 제작비가 고갈되자 데이빗 린치는 영화를 찍으며 신문 배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데이빗 린치는 “내일 아침 무엇을 사 먹을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고난을 겪는다. 그런 데이빗 린치를 보며 그의 아버지는 <이레이저 헤드> 세트장에 방문할 때마다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고 그의 여동생은 정신 치료 목적으로 초월명상을 권하기도 했다. 초월명상은 마지막 히피 세대 문화 중 하나로 유명 그룹 비틀즈로 인해 유명세를 탔다. 데이빗 린치 또한 초월명상 캠프에 참여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그 효과에 대해 의심했으나 약 이십 분 정도 명상을 진행했을 때 소리의 진동(sound vibration)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데이빗 린치는 창작의 흐름을 초월명상을 통해 얻었고, 그 흐름에 창작의 에너지를 내맡겨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데이빗 린치 영화 분석 서적 [The Passion of David Lynch]에서는 초월명상 용어로 데이빗 린치 영화를 설명하고 있고 여러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초월명상 개념을 제외하고 데이빗 린치 영화를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합의에 이르기도 한다.

 

<사구(Dune)>, 1984년 作, <트윈 픽스(Twin Peaks)> TV 시리즈, 1990년 作 

제작 시기의 데이빗 린치

 

명확히 시기를 설정할 수는 없지만 데이빗 린치는 <사구>와 <트윈 픽스> TV 시리즈 제작 당시를 “지옥을 경험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끔찍한 시기로 기억한다. 이는 자신의 창작권을 침해받은 부분에서 데이빗 린치가 겪은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며 데이빗 린치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이 제작 작업 전반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런 그의 특성에 따라 이 시기 데이빗 린치에게는 ‘린치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는데 그는 이 표현에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일반적으로 영화감독은 자신을 명확히 규정하고 싶어 하는 것에 비해 데이빗 린치는 자신이 자신을 규정하는 것, 타인이 자신을 규정하는 것 자체에 대해 기피하고 이를 끔찍할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것이라 생각했다.

 

필모그래피로 접근하는 데이빗 린치의 예술적 여정

 

본격적으로 데이빗 린치의 필모그래피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 촬영을 시작하기 전 데이빗 린치가 겪은 삶의 경험에 대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데이빗 린치는 유년시절 식물을 연구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 열네 살 때까지 숲이 있는 여러 지역으로 계속 이사를 다녀야 했다. 데이빗 린치는 이런 환경에 대해 “나에게는 고향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저 숲에서 숲으로 계속 옮겨 다녔을 뿐이다.” 라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그에게 미국은 커다란 하나의 숲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다. 숲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자신이 살았던 동네가 평범한 미국 동네(스몰 타운)라 생각했던 데이빗 린치에게 보스턴이라는 대도시로 이사한 것은 이상한 경험이었으며 나아가 그 대도시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진다. 데이빗 린치는 대도시라는 이상한 세계에서 영화 이력을 시작했으며 시네필로서 보낸 시간이 없던 유년시절로 인해 자신의 경험이 가장 중요하고 그 경험을 통해 창작이 시작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첫 영화를 찍을 당시 영화 만드는 방법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오로지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을 성장시켜 나갔으며 그런 자기 학습 자체가 그의 영화를 지탱하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레이저 헤드(Eraserhead)>, 1977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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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는 미술학교에서 만난 친구 잭 피스크(Jack Fisk)와 함께 유럽 유학을 결심하지만 그 계획을 취소하고 유럽에 체류한지 15일 만에 필라델피아로 귀국한다. 필라델피아에서 미술 공부를 지속하던 데이빗 린치는 당시 옆방에서 연필 떨어트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굉장히 열악한 환경의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이레이저 헤드>는 이 시기 데이빗 린치가 필라델피아에서 보낸 삶에 대한 기록이다. 벽이 종잇장 같은 아파트에서 살며 오가다 봤던 살풍경에 대해 여러 소음을 활용하여 묘사하고, 스물두 살에 딸을 갖게 된 데이빗 린치가 느끼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데이빗 린치는 영화에 대해 서사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그저 인물(대상)을 깊이 바라보는 것을 중시했으며 그것이 영화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이레이저 헤드>는 데이빗 린치에게 첫 영화 작업이었지만 굉장히 세밀한 방식으로 이미지에 접근했고 그렇기 때문에 전문적 촬영감독이 필요했다. 이때 함께 작업하게 된 촬영감독 프레드릭 엘머스(Frederick Elmes)는 <이레이저 헤드> 작업에 대해 “마치 유리를 깔아놓고 그 위를 걸어가듯 찍었다.”라고 회상할 만큼 약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데이빗 린치의 작업 방식은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런 작업 방식으로 인해 촬영이 진전되는 동안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심지어 1974년에는 일단 촬영을 중단한 후 나머지 부분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끝낼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데이빗 린치는 <이레이저 헤드> 세트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끝내 촬영을 마무리했고 계획상 3주 내로 마무리하려 했던 작업 기간은 결과적으로 촬영에만 4년이 소요됐다. 

힘겹게 만들어낸 <이레이저 헤드>는 여러 제작자, 프로그래머, 일반 관객에게 외면받았다. 그러나 당시 뉴욕에서 심야에 컬트 영화를 관람하는 유행이 있었고 그걸 즐기는 별난 시네필들이 있었다. 벤 바렌홀츠(Ben Barenholtz)라는 유명 영화 배급 업자는 <이레이저 헤드>가 심야상영에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고 데이빗 린치에게 심야상영을 제안한다. 그는 데이빗 린치에게 “이 영화는 아마 흥행에 실패할 거예요. 하지만 오랫동안 상영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실제로 <이레이저 헤드>는 1977년 가을 개봉하여 개봉 첫날 25명, 이튿날 24명 등 적은 관객을 동원했지만 2년 동안 꾸준히 상영됐다. 그 사이 여러 뉴욕의 명사가 <이레이저 헤드>를 관람하게 됐고 그중에는 스탠리 큐브릭, 조지 루카스 등이 포함된다. 데이빗 린치는 심야상영을 계기로 다음 작품 <엘리펀트 맨>을 제안받고 촬영에 들어가게 된다.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 1980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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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맨>은 당시 유명했던 실존 인물 1882년 런던 출생 조셉 메릭(Joseph Merrick)에 대한 이야기다. 데이빗 린치는 실존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었으나 <엘리펀트 맨>이라는 제목만 듣고 흥미를 느껴 제안을 받아들인다. 데이빗 린치에게 <엘리펀트 맨>을 제안한 멜 브룩스(Mel Brooks)는 <이레이저 헤드>를 보고 데이빗 린치가 일종의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혹은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라 생각했다. 데이빗 린치가 그려낸 <엘리펀트 맨>은 “세계가 괴물을 지켜보며 그 시선이 조셉 메릭을 죽여가는 영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엘리펀트 맨> 작업 당시 500만 불이라는 큰 예산과 유명 스태프, 스튜디오 시스템 내에서 작품에 대한 주도권을 잃은 데이빗 린치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모든 것을 멈춰 세우기 위해 매일 밤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했던 유일한 시기였다.”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고충을 겪기도 했다. <엘리펀트 맨> 또한 관객들에게 정확히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미국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와 일본에서 열광적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된다.

 

<사구(Dune)>, 1984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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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구>는 프랭크 허버트(Frank Herbert) 원작 SF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이 프로젝트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이 차례로 준비했으나 길어지는 준비 과정, 시나리오 작업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하차한다. 이후 프로젝트를 제안받은 데이빗 린치는 <사구>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이유로 별 흥미가 없었으나 이내 네 개의 행성을 오가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일곱 개의 다른 버전의 시나리오를 수정한 끝에 촬영에 돌입한다. 데이빗 린치는 영화에 적절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멕시코에 모든 세트장을 사실에 가깝게 구현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제작비가 투입돼 또 한 번 흥행에 참패한다. 4,500만 불의 제작비가 투입된 <사구>는 최종 수익 3,000만 불을 기록하여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천국의 문>과 함께 1980년대 작품 중 기록적인 흥행 실패 사례로 남는 불명예를 겪는다. 그러나 데이빗 린치는 이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훗날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배우 카일 맥라클란(Kyle Maclachlan)을 만나게 된다.

 

<블루 벨벳(Blue Velvet)>, 1986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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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맨>을 영국에서 촬영하고 <사구>를 멕시코에서 촬영한 데이빗 린치는 이제 미국에서 촬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블루 벨벳>을 찍기 전 데이빗 린치는 “그들이 가질 수 없는 이미지, 사운드를 안겨주고 싶었다. 나아가 그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찍고 싶었다.”라고 자신의 연출 의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데이빗 린치는 1980년대에 ‘만일 미국이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없이 1980년대로 도착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을 하고 그가 재현하고 싶은 시점, 가상의 시간에 대해 찍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며 데이빗 린치가 미국인들에게 던지는 농담의 성격을 띠는데 그 농담은 듣는 사람이 단순히 웃을 수만은 없는 지점이 있다. 데이빗 린치는 <블루 벨벳>을 통해 영화 미학의 핵심이 사운드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복잡한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인물을 구현하기도 했다. 또한 과거에 자신이 떠올린 근본적 질문 (‘그림이 움직일 수 있다면?’, ‘그림이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기 위해 도로시의 방을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잘라오다시피 구성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는 미국에 VHS 테이프가 등장하며 극장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대여해서 영화를 보는 문화가 형성됐고 <블루 벨벳>은 그해 가장 많이 빌려 본 영화가 됐다. 이후 <블루 벨벳>은 미국에서 하나의 문화적 형상으로 자리 잡으며 데이빗 린치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된다.

 

<트윈 픽스(Twin Peaks)> TV 시리즈, 1990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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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는 VHS로서 <블루 벨벳>이 흥행에 성공함에 따라 ABC 방송국으로부터 <트윈 픽스> TV 시리즈 제작을 제안받는다. 데이빗 린치는 이 제안을 받고 ABC 방송국의 자본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 고향을 재현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트윈 픽스 제작 전 단테의 [신곡] 중 <연옥> 편과 그림 형제의 동화책을 참고했다. 그리고 제작 당시 <블루 벨벳>의 경험을 떠올리며 ‘TV 드라마로 만들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홀로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데이빗 린치는 “거실의 소파는 꿈을 꾸기 위한 적절한 장소”라고 언급하며 매주 목요일 저녁 8시마다 집에서 꿈꾸듯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나갔다. TV 드라마의 또 다른 장점은 영화가 갖고 있는 두 시간이라는 한정된 러닝타임에서 벗어나 기승전결의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트윈 픽스>는 데이빗 린치에게 새로운 실험 형식이었으며 이 시리즈를 통해 다시 한 번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결과적으로 <트윈 픽스>는 미국 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며 데이빗 린치는 이 시리즈를 통해 미국의 스타로 거듭난다.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 1990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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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 픽스> 시리즈의 협력 프로듀서(associate producer) 몽고메리 클리프트(Montgomery Clife)는 데이빗 린치에게 배리 기포드(Barry Gifford)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아달라고 제안한다. 데이빗 린치는 그 제안을 받고 배리 기포드의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몽고메리에게 이 작품을 자신이 연출하면 안 되겠느냐는 제안을 하고 그래서 만들어진 작품이 <광란의 사랑>이다. 데이빗 린치는 <광란의 사랑>을 구상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릴린 먼로가 <오즈의 마법사> 속으로 들어간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라는 질문으로 출발했다. 이후 원작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으로 로드무비를 찍었으며 그 결과 이 작품은 데이빗 린치 작품 중 가장 유별나고 장르적으로 코미디에 속하는 작품이 되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지점은 이야기를 판타지로 몰고 가다 리얼리티로 느껴지는 순간 멈춰버리는 데이빗 린치만의 놀라운 타이밍이다. 이 감각은 데이빗 린치 영화 중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이며 이를 통해 <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감각을 설명할 수 있게 만든다. 데이빗 린치는 이 작품을 통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관객들은 그 결정에 대해 야유를 보냈지만 데이빗 린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트윈 픽스(Twin Peaks: Fire Walk With Me)>, 1992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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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는 <트윈 픽스> TV 시리즈 속 로라 팔머가 살해당하기 일주일 전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트윈 픽스: 불이여 나와 함께 걷자>를 찍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외면을 받았는데 이는 <트윈 픽스> TV 시리즈가 지나치게 성공적이었고 TV 시리즈에서 구축한 판타지를 영화가 다 부숴버린 측면 때문이었다. 미국 영화 산업 시스템 내에서 흥행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고 데이빗 린치는 이 영화의 실패로 인해 자신의 경력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데이빗 린치가 <블루 벨벳>을 통해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띄었던 상업적 활기는 사실상 이 작품으로 인해 마무리 지어졌다. 이후 그는 한동안 CF, MTV 등 방송 분야에서 시간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미술에 몰두하게 된다.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 1997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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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3일 흑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이 고속도로에서 과속으로 주행하다 경찰의 제지를 무시하고 도주 후 백인 경찰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인근에 살던 한 사람이 비디오로 촬영 후 방송국에 전달했고 이 영상이 TV로 방영되며 결과적으로는 LA 폭동으로 이어진다. 데이빗 린치는 이 사건을 통해 비디오라는 새로운 시각 매체가 지닌 힘에 주목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배리 기포드와 공동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한다. 시나리오의 첫 출발은 ‘낯선 누군가가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고 그 안에는 자신의 사생활이 담겨있다는 것.’이었다. 데이빗 린치는 <로스트 하이웨이>를 만들며 “친숙한 것이 그 일상성을 탈피할 때 가장 섬뜩하고 두려운 것이 된다.”라는 프로이트의 개념 ‘친숙한 낯설음(Uncaany)’을 끌어들였다. 데이빗 린치는 이를 통해 카메라가 사실을 찍고 있지만 그 사실이 곧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전달하려 했다.

<스트레이트 스토리(The Straight Story)>, 1999년  作,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 2001년  作 이후 <인랜드 엠파이어>, 2006년 作

데이빗 린치는 일흔셋의 노인이 자신의 형을 만나기 위해 트랙터를 타고 한 달 보름간 여행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찍는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월트 디즈니 제작 작품으로 데이빗 린치 작품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G등급(전체관람가)으로 상영된다. 데이빗 린치는 주인공과 비슷한 속도의 시선을 지닌 촬영 감독을 원했고 당시 여든하나의 프레드 프란시스(Freddie Francis) 촬영감독과  작업하게 된다. 이 영화는 두 시간 이십 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그저 여행의 과정을 순서대로 따라가며 촬영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 데이빗 린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통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멀홀랜드 드라이브> 촬영 이후 명상에 심취하여 ‘명상의 과정처럼 영화를 찍을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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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촬영하게 된 작품이 <인랜드 엠파이어>로 데이빗 린치는 이 영화의 엔딩을 미리 정해놓지 않고 장면(Scene) 단위로 시나리오를 썼으며 3년간 촬영했다. 데이빗 린치는 <인랜드 엠파이어>를 통해 창작의 내면(Condition of Creation)을 찍고자 했으며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과정 자체를 자신이 찍음으로써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그저 내버려 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 영화는 분석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그 영화의 성격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영화이며 데이빗 린치가 장면을 찍을 때 어떤 감정 혹은 어떤 컨셉으로 찍었는지 추측하는 것이 영화에 대한 온당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빗 린치는 <인랜드 엠파이어>를 소니 카메라 PD-150 기종을 활용해 촬영했는데 이는 주변 사람들이 영화의 화질에 대한 우려를 일으켰다. 그러나 데이빗 린치는 “화질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영화와 다른 것.”이라 얘기하며 흐릿하고 부정확한 상태를 자신의 손으로 찍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덧붙여 “이 카메라는 같은 것을 다르게 보게 만들고,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필름으로 찍은 것과 같은 대상에 대해 다르게 반응하게 만든다.”라고 언급했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데이빗 린치의 가장 솔직한 자신에 대한 기록의 여정이었으며 어디에서도 그 무언가를 훔쳐 오지 않고, 자신이 그 방법을 만들어나간 사람임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강의를 끝맺으며 예술에 삶을 걸고자 하는 창작자들에게 데이빗 린치로부터 두 가지 태도를 배울 것을 제안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정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디에서도 아닌 내가 그 방법을 창조해나가는 태도’이다. 덧붙여 데이빗 린치에 대해 “나는 왜 내 삶을 창조하는가?”라는 니체의 문장을 인용하며 ‘니체의 계보에서 이어지는 예술가’라 명명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정리. 김수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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