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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학교

모모 영화학교는 예술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진지한 영화 감상과 영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장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정기적으로 마련하고 있는 영화 강좌 프로그램입니다.

세상을 바꾼 영화, 영화를 바꾼 세상 4강) 영화는 어떻게 믿음을 순진한 친구로 만들었는가?

영화는 어떻게 믿음을 순진한 친구로 만들었는가?

이용철 영화평론가

 

추천사: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저의 대답은 단연코 '아니다'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런 믿음도 없이 왜 이 강연을 맡았냐'고 되물을 법합니다. 저는 더 이상 예술이 삶보다 대단하거나 큰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저에게 이번 강연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영화가 관객에게 주었던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보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요."


강의 개요: 영화가 태동했던 때와 영화의 초기 역사에서 영화가 대중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우선 재확인하고, 거기에서 점프해 현대의 젊은 작가들인 샤프디 형제, 션 베이커, 안드레아 아놀드, 켈리 레이차트의 작품을 통해 ‘영화와 소외 계층’이란 주제를 전개해 본다. 여기서 소외 계층이란 빈곤층, 여성 등을 아우르는 것이며, 강연의 준비 과정에 따라 감독의 리스트는 변경 가능하다.

 

뤼미에르 형제: <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 - 그들의 노동자에 대한 시선과 태도, 대중을 어떻게 규정했을까.

 

영화: 다큐멘터리와 달리 영화는 꿈꾸는 영역이기에 대중들과 거리가 먼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별다른 예: 프레스톤 스터지스 <설리반의 여행> / 존 포드 <우리의 계곡은 푸르렀다> / 윌리엄 와일러 <우리들의 낙원> - 소박한 인민주의

 

프로파간다 영화, 혁명을 목표로 하는 영화, 이데올로기의 실천을 하는 영화: 68혁명과 영화에서 켄 로치에 이르기까지.

 

다르덴 형제의 영화: 영화에서 버려졌던, 현실에서는 평범하나 영화에선 낯선 대상으로 접근하고 드러내기.

 

현대의 신진 작가들: 대상의 세분화 – 성소수자, 여성

 

행동이 사라진 시대, 그들의 태도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게 무슨 힘을 득하는가. -> <사수>라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단초를 얻는다. 세 감독 중 한 명인 김설해 감독의 목소리다. “그들의 이야기는 승리도 패배도 아닌 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안심하지 않기로 했다. 불안한 마음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더 밝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괜찮냐고 묻는 질문들이 별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우리는 계속 물을 것이다. 그 여름 희망버스를 타고 가던 길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처럼, 그들의 침묵 뒤에 놓인 수많은 이야기들을 궁금해 하면서.” 유성기업 노조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에키타 유키코. 2017년 3월, 42년만에 사회로 복귀. 적을 타도하고 파괴하는 것보다도 자기 편을 늘리고 자기의 힘을 키우며 창조하는 식의 투쟁을 하고 싶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죽이지 않는 혁명’일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말하려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며 지하에서 비합법적 활동을 했다가 권력의 손에 의해 모든 것이 밝혀졌을 때, 가족과 친구들이 우리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에 대해서 절실하게 뼈아픈 반성을 했습니다. 동시에 내가 팔레스타인 혁명을 하면서 배우게 된 혁명이란 뛰어난 누군가가 이상적 사회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생활의 터전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바꿀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네온 바이블’을 쓰다.

굿타임

 

- 결말에 대한 묘사가 있는 글임을 밝힌다.

 

한 남자는 부르주아 주부들로부터 사랑받으며 돈을 버는 제비족이 되고 싶었지만, 그가 함께 지내게 되는 사람은 사기를 치며 사는 홈리스다. 친구가 병에 걸리자 두 남자는 차가운 뉴욕을 떠나 따뜻한 플로리다로 떠나기로 한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친구는 그의 품에서 죽고 남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았다. 뉴욕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두 남자의 씁쓸한 이야기를 다뤄 X등급 영화로는 처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는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낭만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마틴 스콜세지의 <비열한 거리>(1973)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뉴욕의 제왕이 된 스콜세지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수많은 감독들이 명멸했다. 작년 칸영화제의 경쟁부문에 <굿타임>으로 초대된 조시와 베니 사프디 형제가 요즘 스콜세지의 후계자로 뜨겁게 거론되는 중이다. <굿타임>이 스콜세지의 <특근>(1985)과 시드니 루멧의 <뜨거운 오후>(1975)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들었고, 스콜세지가 그들의 신작을 제작한다고 발표했을 정도다. 사프디 형제의 2014년 작품 <헤븐 노우즈 왓>의 결말은 <미드나잇 카우보이>를 변주한다. 아리엘 홈즈의 미출간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화했으며, 그녀가 직접 주연을 맡은 <헤븐 노우즈 왓>(2014)은 뉴욕 홈리스들의 이야기다. 여러 사건을 겪다 재결합한 홈리스 커플은 플로리다로 떠나기로 결정한다. 마지막 그레이하운드를 떠나보내고 다른 버스에 올라탄 그들은 잠을 자며 남쪽을 꿈꾼다. 그러나 거리를 전전하던 홈리스에게 영원한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여자가 자는 동안 버스를 세워 내린 남자는 북쪽으로 향하던 중 빈집에서 자다 불타 죽는다(실제 벌어진 일이다). 얼마 후, 혼자 남은 여자는 마찬가지로 버스를 세워 내리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의 홈리스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가 짓는 표정은 오래 전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 <헤븐 노우즈 왓>은 서늘하고 건조한 도시 뉴욕을 처절하게 묘사해 <비열한 거리>마저 순진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사프디 형제는 인간끼리 나눌 법한 온정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고 자란 뉴욕이 어떤 곳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프디 형제 영화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얼핏 보기에 <굿타임>의 태도도 비슷해 보인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는 덜컹거리는 인생을 사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표준적인 삶을 사는 아시아인을 종종 비추며 밑바닥을 전전하는 삶을 대비시키고, 유대인을 향한 농담을 삽입하는 걸 잊지 않는다. <헤븐 노우즈 왓>에서 마약을 사라고 돈을 주는 유대인이 나왔다면, <굿 타임>에서는 보석금을 놓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유대인이 등장한다. 오프닝 크레디트가 채 끝나기 전에 사건이 일단락되는 방식도 전작과 비슷하다. 코니(로버트 패틴스 분)와 닉(베니 사프디 분) 형제가 은행을 털다 경찰에 쫓긴다. 경찰에 잡혀 수감된 닉이 난동을 피우다 병원으로 이송되자 코니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병원에 잠입한다. <굿타임>은 코니가 이후 보내는 하룻밤의 이야기다. 씨네21의 이주현 기자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1t 트럭의 폭주에 동참한 기분’이라고 썼다. 글쎄다, 1t 트럭은 생각보다 작은 차이거니와, 영국의 그룹 ‘더 스미스’가 ‘10톤 트럭에 받혀 죽는 사랑’을 노래한 게 벌써 30여 년 전이니 1t 트럭은 야박한 표현이다. 어쨌든 <굿타임>은 질주하는 이야기로 평가받는 편이며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두 번째 본 <굿타임>은 많이 다른 영화였다. 일렉트로닉 뮤직에 실려 냅다 달리는 영화 같았던 <굿타임>은 기실 달릴 때보다 멈춰 설 때가 더 많은 영화다. 코니는 여러 시도를 하지만 제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어서 스스로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는 인물이다. 당연히 영화도 뒤뚱거리는 형국이며, 코니가 때때로 접하는 유색 인종들도 차갑기보다 따뜻한 쪽에 가까운 인물이어서 그를 인간으로 대해준다. 더욱이 일렉트로닉 음악도 클라우스 슐체 풍이기에 예스럽다. 그래서 <굿타임>이 <헤븐 노우즈 왓>처럼 처절한 뉴욕 스토리라는 판단을 철회하기로 했다. 오히려 베니와 공동 연출하기 전, 조시 사프디가 초기에 연출한 뉴욕의 우화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2008)의 스타일과 태도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시키는 작품이었다.

 

영화가 현실을 꼭 집어서 정확하게 반영할 필요는 없다. <헤븐 노우즈 왓>의 뉴욕이 한 예다. 실제 삶에서 건져낸 이야기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했을지 모르지만, 영화의 매력이 그만큼 상승하는 건 아니다. 관객은 주인공 여성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의 스타일은 다르다. 유머러스할 뿐만 아니라 사프디 풍의 우화를 삽입하는 방식에서 그러하다. 엘레노어는 습관적으로 물건을 훔친다. 운전도 못 하면서 훔친 차에 친구를 태워 뉴욕과 보스턴을 왕복하는 인물이 그녀의 캐릭터다. 마침내 경찰에 잡힌 그녀는 ‘센트럴 파크 동물원’을 보게 해달라고 애원해 시간을 얻어낸다. 수갑을 찬 채로 북극곰을 바라보던 그녀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계곡을 건너가 북극곰을 맞이한다. 그녀는 흰 곰의 털을 쓰다듬는데 우습게도 그 곰은 엉성한 인형이다. 리얼리즘 영화에서 이게 무슨 일인가. 그게 사프디의 방식이다. 냉랭한 현실에서 거짓 우화를 보여주려면 차라리 그것이 허구임을 드러내겠다는 태도. “이건 영화거든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단편영화 <검은 풍선>(2012)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혼자 떠돌던 ‘검은색 풍선’은 밴에 갇힌 풍선들을 발견하고 창을 두드리다 급기야 부숴버리고, 알록달록한 풍선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키다리 아저씨>(2009)의 악몽 시퀀스에 등장하는 거대한 모기는 또 어떤가. 그렇다고 해서 사프디 형제가 미셸 공드리로 바뀌진 않는다. 사프디 형제는 자기들이 만드는 것이 영화임을 밝히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딱 그만큼만 나간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필수 코스인 ‘병원, 감옥, 다리’ 등을 떠도는 <굿타임>에서 사프디의 성향을 대변하는 공간은 ‘어드벤처랜드’라는 이름의 놀이공원이다. 도시 속에서 순진한 우화를 조성하기에 어울릴 공간.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코니의 곁에는 나비 머리띠를 한 흑인 소녀가 뚱한 표정으로 앉았고, 뒷좌석에는 실수로 동반하게 된 얼치기 범죄자가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그들이 숨겨둔 돈과 마약을 찾는 곳은 그야말로 영화적이다. 귀신 마네킹, 잘려나간 팔, 드라큘라 묘비 등은 영화의 소품에 다름 아니며, 괴성이 흘러나오는 고문 장치는 영화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코니는 경비원의 옷으로 갈아입고 직업인 흉내를 그럴싸하게 낸다. 알록달록한 불빛이 사방에 펼쳐진 어드벤처랜드에서 코니가 모험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굿타임>은 실패한 모험의 이야기다. 지적 장애인인 동생과 숲에서 살기 위해 은행을 털었던 코니의 계획은 실패한다. 사프디 형제가 보여주려는 게 ‘어김없이 실패하는’ 현실에 있는지, 아니면 ‘어설프나마 모험하는’ 영화적 순간에 있는지 선택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다만 전자의 영화를 뉴욕의 범죄 스릴러에서 흔히 보아 왔음을 기억한다면, 사프디 영화에서 구해야 하는 건 ‘모험과 우화의 방문’이다. 그들은 알록달록한 불빛으로 ‘네온 바이블’을 써 코니의 형제애를 칭송한다. 곧 쓰라린 현실로 돌려보낼지라도 그에게 짧은 위안을 선사하고자 한다. 이어 위안에 취하기 전에 현실로 돌아가라고 등을 두드린다. 유명 건축가의 자손인 사프디 형제가 영화를 축조하는 방식은 그러하다. 사실 영화란 게 그런 것이다.

 

<믹의 지름길>

얼마 전 두 감독에게 그들이 택한 화면 사이즈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공히 ‘영화적’ 선택이라고 답했다. 화면 사이즈가 주는 인상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기온의 자매>(1936)와 <게임의 규칙>(1939)을 스크린에서 만난 뒤 나는 1.33:1 비율이 주는 강렬한 영화적 경험에 매혹되어 왔다. 10년 내에 만들어진 작품 중 화면 사이즈가 각별한 기억으로 남은 건 딱 두 편이며 둘 다 ‘아카데미 비율’로 찍혔다. 하나는 칸영화제에서 본 <엘리펀트>다. 거대한 스크린에 박힌 4:3 사이즈의 영상이 에메랄드 빛 하늘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HBO' 방영용으로 제작된 영화라서 4:3 사이즈라고 알려져 있지만 믿긴 힘들다. 이전부터 ‘HBO’가 1.78:1 비율의 영화를 제작했거니와, 구스 반 산트가 단지 TV 방영용이란 이유로 그 비율을 선택했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충격의 복도’를 체감하기에 스탠더드 비율만한 게 없다고 여긴 것 같다. 실제로 이 영화의 스탠더드 버전과 와이드 버전을 비교해보면 전자의 폐쇄감과 공포감을 후자의 그것이 따라가지 못한다. 아래위와 좌우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 그 느낌이 4:3 사이즈의 <엘리펀트>에 있다. 

다른 하나는 지난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된 <믹의 지름길>이다. 지난해 같은 영화제에서 보았던, 마찬가지로 4:3 사이즈인 페드로 코스타의 작품보다 <믹의 지름길>이 준 충격이 더 컸다. <믹의 지름길>은 일군의 개척민들이 강을 건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처음엔 영사실에서 마스킹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상영하는 걸로 오해했다. 보통의 화면 구도에서 인물에게 할당되는 비중은 완전히 무시되어 있었고,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위로 황폐한 산과 아래로 푸른 강이었다(블루레이보다 스크린으로 볼 때 더욱 실감된다). <믹의 지름길>에서 화면 사이즈는 곧 영화의 주제다. 켈리 리처드는 서부의 숨은 역사를 새로 혹은 고쳐 쓰려는 게 아니다. 그녀는 웨스턴 장르의 원형을 불러와 질문을 하려 한다. <믹의 지름길>은 문명과 야만이 대면하고 선과 악이 충돌하며 영웅이 탄생하는 장르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왜 그랬죠?”라고 묻는 작품이다. 4:3 사이즈는 필연의 선택이었다.

1845년, 세 가족이 ‘오리건 산길’을 따라 지름길로 이동하며 정착할 땅을 찾는다. 길을 안내하는 자는 믹이라는 사내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그를 불신하기에 이른다. 아무리 걸어도 물과 약속의 땅이 나타나지 않는 탓이다. 그들 중 몇은 믹을 영국의 첩자로 의심한다. 믹이, 개척자를 외딴 곳으로 따돌리는 임무를 띤 사람이라는 거다. 물과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길을 잃은 그들은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 와중에 그들은 인디언 한 명을 생포한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그들은 어느덧 인디언의 뒤를 따르게 된다. 

카메라가 간혹 인물에 다가설 때에도 관객은 배우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들의 얼굴은 모자와 보닛에 가려져 있다. 주인공 에밀리 역의 미셸 윌리엄스를 알아차리려면 10분이 지나야 한다. 그나마 그녀의 얼굴은 흙바람을 잔뜩 뒤집어쓴 상태다. 게다가 인물들이 속삭이거나 우물거리는 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으며, 대신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와 메마른 땅 위로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다. 인물들은 19세기 중반의 황야에서 방황하는 것 외에 다른 이야기는 품지 않는다. 구원자로 나설 영웅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들은 황무지처럼 헐벗은 상태로 걷고 또 걷는다. 리처드는 노련한 작가가 카메라를 쥔 듯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세계를 단순 명료하게 재현한다. 이것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서부의 모습이다. 서부의 전설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옛 서부인의 지친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일곱 개척자의 처지는, 리처드의 전작 <웬디와 루시>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알래스카로 향하는 웬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공교롭게도 웬디가 영화 내내 맴도는 공간도 오리건이다). 그들이 찾아 헤매는 건 두 번째 에덴이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건 함께 곡식을 가꾸고 음식을 마련해 먹을 수 있게 해줄 터전이다. 그러니 악당에게 총을 쏠 이유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카메라는 자연스레 여자 인물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믹의 지름길> 이전에 만들어진 어느 서부영화가, 보닛을 뒤집어쓰고 긴 치마를 치렁거리며 무리를 뒤따르는 여자에게 주목했던가. <자니 기타>에서 레이스와 치마를 휘날리며 여장부로 행세하던, 그래서 서부영화의 어떤 인물보다 쾌감을 안겨준 두 여자 주인공조차 <믹의 지름길>의 여자들 앞에서는 허세에 불과하다. 

세 여자가 등장한다. 간혹 공포에 떨고 눈물도 보이지만 그들은 공동체의 바탕을 책임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가사를 포함해 여성들이 맡았을 일거리는 기존의 서부영화에서 막연하게 암시되는 정도를 넘어 표현되지 않았다. <믹의 지름길>은 그런 짐작일랑 버리고 여성의 노동을 직시함으로써 그 가치를 인식한다. 그들은 칠흑 같은 새벽에 불을 피워 음식을 준비하고, 물을 관리하고 땔감을 구하고 곡식을 갈며, 틈틈이 뜨개질을 하거나 입고 다닌 무거운 옷가지를 세탁한다. 그러다 무리가 이동을 할 때면 뒤에 남아 천막을 갠 다음 마차 뒤편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평자들은 <믹의 지름길>을 새로운 웨스턴으로 평하면서 이 영화의 여성적 측면을 언급한다. 물론 위에 말한 점들이 영화의 그러한 특성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여성주의 웨스턴’이라 부르도록 만드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도입부에서 소년은 성경의 ‘생명의 나무(Tree of Life)' 구절을 읽는다. 그것이야말로 개척자들이 갈망하는 대상인데, 결말부에서 그들은 황야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한그루 앞에 도착한다. 그렇다면 <믹의 지름길>은 삶의 나무에 도달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에 관한 영화일까. 버티고 선 나무는 믿음을 시험하는 또 다른 유혹이다. 마침내 고개를 숙인 믹은 에밀리의 남편이 뜻하는 대로 행동하겠다고 말하는데, 카메라는 방향을 틀어 에밀리와 인디언를 바라본다. 영화는 길을 잃은 인물들 사이에서 미래를 성찰하는 인물로 에밀리를 지목하며, 그 지점에서 에밀리는 <웬디와 루시>의 웬디와 같은 길 위에 놓인다(미셸 윌리엄스가 두 역할을 모두 연기했다). 웬디가 마주친 두 남자는 상반된 이야기를 전했다. 늙은 경비원은 “모두 잘 될 거야”라고 말했고, 부랑자는 “우린 길을 잃었어”라고 읊조렸다. 오리건을 떠나는 열차를 훔쳐 탄 웬디가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맡긴 것처럼, 150년 전 동일한 자리에서 에밀리 또한 같은 질문을 떠안는다. 영화는 모든 것이 시작되는 시간에 여성에게 길을 물음으로써 서부라는 공간의 주체로 여성을 세운다. <믹의 지름길>은 (이미 도착한) 미래의 길을 여성의 시선에서 찾은, 아마 유일한 서부영화일 것이다. 

<믹의 지름길>은 인디언이 무리로부터 멀어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하겠다. 화면 너머로 길을 떠나는 자는 고독한 카우보이가 아닌 정체불명의 인디언이고, 관객은 에밀리의 시선을 빌려 점점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인디언을 뒤쫓는 에밀리는 혹시 알았을까, 인디언과 그녀의 존재는 서부의 역사에서 기억되지 않으리란 것을. 그리고 그 순간, <믹의 지름길>은 끝내 서부의 잊힌 역사에 관한 서늘한 증언을 남긴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코언 형제의 <브레이브>는 한 소녀가 훗날 기억하게 될 서부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믹의 지름길>은 소녀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은 다른 데 있었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믹의 지름길>의 블루레이는 DVD와 합본으로 출시됐으며, 영화만큼 소박하고 조용한 현장을 담은 짧은 메이킹필름(10분)과 예고편을 부록으로 제공한다.

 

정리. 이효진 모모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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