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의 전당

명예의 전당은 그 동안 영화사 백두대간과 인연을 맺었던 거장 감독 또는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기록합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

"깜깜한 암흑 속에도
여전히 '시'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키아로스타미의 작품은 영화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 장 뤽 고다르
프랑스 누벨바그의 대표 주자인 장 뤽 고다르는 1993년 뉴욕비평가협회 특별상 수상에 내정되었으나 정중한 사의를 표명하면서 그 이유를 영화제 프로그램에 이란의 키아로스타미가 빠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현대영화의 거인이 이토록 흠모하는 키아로스타미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1940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출생하였다. 테헤란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광고 영화를 제작하던 그는 1968년 청소년지능개발연구소(KANUN)라는 기관의 제의로 영화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키아로스타미가 서구에 ‘발견’된 것은 로카르노 영화제를 통해서이다.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 알려진 이 영화제에서 그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청동 표범상을 비롯한 7개 부문을 석권하면서 일약 전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혜성으로 떠오른다(그 해 로카르노 영화제는 한국의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황금 표범상을 수상하여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자리). 이후 키아로스타미는 서구 영화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전 세계 약 70여개 영화제에 초청 상영되었고 이 작품을 통해 각 영화제는 이란 영화주간을 마련하여 키아로스타미를 비롯한 이란의 숨은 감독들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키아로스타미의 뒤를 이어 에브라힘 포르제는 <항아리>로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 표범상을 수상하고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을 거친 자파 파니히는 작년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한다. 이제 이란 영화는 중국 영화 이후 가장 신선하고 주목받는 영화의 보고로 격찬 받게 된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이러한 이란 영화의 바람의 중심에 존재한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열풍 이후 1989년 <숙제>가 로테르담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1990년 <클로즈 업>은 유럽과 미대륙의 유수 영화제에 초청된 후 프랑스의 영화 전문지 [까이에 뒤 시네마]가 선정한 그 해의 영화 10선에 등재된다. 1992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칸느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에 선정되고 키아로스타미 자신은 이 영화제에서 생애의 업적을 기리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최근 작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미국에서 주요 배급망을 타는 최초의 이란 영화로 기록된다. [까이에 뒤 시네마]는 잡지의 반 분량을 할애하여 이 새로운 거장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특집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그것은 다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영화 예술이 영원한 청춘의 젖줄을 대는 이름이다.
1. 구로자와 아끼라와 장 뤽 고다르가 찬사를 바치는 이유
친구의 숙제를 돌려주기 위해 머나먼 산길을 달려가는 순수한 동심을 담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키아로스타미는 이후 특유의 때 묻지 않은 투명한 영화들로 세계를 매료시켰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청년의 무모할 정도로 순진한 실화를 다룬 <클로즈업>(1990)은 파리에서 석 달간 장기 상영되는 인기를 누렸고 1991년 프랑스 영화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誌가 뽑은 그 해의 최고작 10편에 선정됐으며 <내 친구 집..>의 주인공들을 찾아가는 감독의 인간적 아름다움이 담긴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 역시 깐느 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부문에 선정되며 각종 영화제에서 다투어 초청을 받았다. 1994년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발표와 함께 그에 대한 찬사는 가속도가 붙었고, 전 세계의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며 <까이에 뒤 시네마>, 같은 저명한 영화잡지들이 경쟁하듯 그에 대한 특집을 준비하게 했다. 1997년 깐느 영화제는 <체리향기>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하며 키아로스타미를 우리 시대 최고의 감독으로 인정했다. 구로자와 아끼라나 장 뤽 고다르 같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감독들이 최고의 찬사를 바치는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가 1990년대를 대표할,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내는 시네아스트라는 사실은 구로자와 아끼라의 말처럼 그의 영화를 한 번이라고 본 사람이라면 동의 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2. 화가의 감수성, 광고인의 감각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1940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태어났다. 테헤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귀 영화 타이틀 디자인과 CF,제작 등에 참여했다. 1969년 카눈(Kanun : 아동지능 개발연구소)에 입사하면서 어린이들의 교육과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린이들을 소재로 한 많은 단편/장편 영화들을 발표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답게 돋보이는 영상미와 광고인의 감각이 느껴지는 탁월한 순간포착 능력이 담긴 영화들을 선보인 그는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특별히 마련했던 그의 전시회에서 화가 겸 사진작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공개하기도 했다.
3. 아주 천천히, ‘순간’이 낚이기를 기다린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픽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경계를 허문 ‘시네마-베리떼’의 진수를 보여줌으로써 전혀 새로운 매력의 영상을 제시한다. 그의 영화는 이란의 현실과 영화작업에 대한 성찰이라는 이중의 틀로 짜여진다. 그의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가 만나면서 현실과 환상을 결합시켜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그는 관객들이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주변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듯 그렇게 자신의 영화를 보아주도록 유도한다. 가장 자연스런 느낌으로 다가서기 위해 그는 직업배우들이 아닌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나 아이들을 배우로 쓰고 또 이들에게 대본과 대사를 주고 연기를 지도하는 대신 영화의 주제에 대한 설명을 해준 뒤 이들이 카메라의 존재를 잊고 자기방식대로 감정을 표현할 때까지 기다린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를 찍을 때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처럼 아주 천천히 기다린다” 고 자신의 연출방식을 설명한 적이 있다. 이런 정직한 접근으로 특유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것이다.
4. 이란 영화를 세계로 끌어올린 장본인 키아로스타미
그를 만나본 많은 이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자신의 영화처럼 진실하고 겸손한 이 감독에게 찬사를 바친다. 이미 세계적인 거장이 된 그는 그 이전부터 끊임없이 후배 감독들을 양성해왔다. 직접 쓴 시나리오를 후배감독들에게 주고 때로는 편집 작업까지 도와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완성된 우수한 작품의 대표적 예로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황금 표범 상을 수상한 바 있는 에브라함 포르제쉬(Ebrahim Foruzesh)의 첫 장편영화 <열쇠 The key>를 들 수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영화에서 시나리오와 편집을 맡아 그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는데 <열쇠>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명성이 높아진 이후인 90년 뒤늦게 베를린 영화제의 ‘어린이에 관한 영화 페스티발’부문에 초대되어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1996년 깐느 영화제에서 <하얀 풍선 White Balloon>으로 신인감독상인 황금 카메라 상을 수상한 자파르 파나히(jafar panahi)감독 역시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비롯한 키아로스타미 영화들의 조감독 출신이며 현재는 동경 영화제와, 뉴욕 영화제, 런던 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다투어 초청되는 세계적 감독의 대열에 올랐다. 그는 깐느 영화제의 시상식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시나리오를 준 선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바친다는 말로 감격의 인사를 대신했다.
5. 키아로스타미, 그로부터 새로운 영화사가 시작된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진심으로 아이가 되어야 한다. 현란한 카메라 워킹과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스펙터클 대신 키아로스타미는 고도로 절제되고 단순한 카메라와 내러티브로 가장 담아내기 힘든 주제-순수와 희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란의 궁핍한 사회상과 미래를 약속받을 수 없는 아이들, 북부이란의 참혹한 지진을 보여주며 키아로스타미는 숭고한 삶과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헐리우드의 기술적 상업영화나 유럽영화의 관념적 스타일을 뛰어넘으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숨결이 담긴, 투명한 순수와 온기가 담긴 영화로 세계의 비평가들과 관객들을 매료시킨 키아로스타미. 그의 영화는 눈만을 즐겁게 하는 영화가 만연한 이 시대에 관객의 가슴을 적시는 아름다운 축복이다.
이란 북부 3부작 이야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키아로스타미의 대표적인 작품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이란 북부 3부작으로 통한다. 그것은 세 작품 모두 이란 북부 농촌 지방인 코케 마을을 배경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 영화는 모두 코케 마을 인근의 집과 소품, 갈지자로 난 언덕길, 올리브 나무 숲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그리고 등장 인물은 대부분이 코케와 부근 마을 사람들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제작된 이후 이란의 북부 지방에 큰 지진이 발생한다. 그 영화에 출현했던 사람들, 특히 아마드와 네마자데 두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키아로스타미의 분신인 한 영화 감독이 소년들의 생사를 찾아 코케 마을로 떠난다. 지진으로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은 삶의 고통스런 업보처럼 보이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유머와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촬영하는 영화 제작 현장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담아 낸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 애타게 생사를 찾던 두 소년 아마드와 네마자데가 성장한 모습으로 나오고 관객에게 앞의 두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낯익은 장면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 단역을 맡은 후세인과 타레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후세인은 타레헤를 사랑하지만 집도 없고 글도 모르는 그를 타레헤의 집안에서 반길 리 없다. 촬영 도중 후세인은 타레헤에게 계속 말을 걸고 집으로 돌아가는 올리브 나무 숲길에서 열심히 구혼을 하지만 타레헤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둘은 점점 카메라로부터 멀어지고... 그때 갑자기 타레헤를 따라가던 후세인이 뛰면서 돌아온다. 타레헤가 구혼을 받아들인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두 남녀를 멀리서 잡고 따라가는 아름다운 롱 테이크는 키아로스타미 미학의 결정체이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전 세계 영화제가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이다”
-Cineaste
* 네오 리얼리즘의 유산
“사티아지트 레이가 죽었을 때 나는 너무 상심했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보고 나니 레이의 자리를 이을 만한 영화 작가를 신이 발견한 것 같다”
-구로자와 아끼라
구로자와 아끼라가 인도의 거장 레이의 후계자로 지목한 키아로스타미는 그러나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으며 영화광의 유년을 보내지도 않았다.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그가 생애에 걸쳐 본 영화는 50여편 남짓. 그가 20대 이후에 처음 접한 영화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작품을 비롯한 네오 리얼리즘 영화였다고 한다. 이 점은 그의 작품에서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아이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 문학이나 신화에서 각색을 하지 않고 현실에서 소재를 찾고 화려한 세팅이나 특수효과 없이 저 예산으로 작업을 한다는 점 등이 네오 리얼리즘의 전통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부분이다. 키아로스타미 자신은 네오 리얼리즘과의 연관성을 스타일의 추종이라기 보다는 전후 이탈리아의 척박한 상황과 이란의 현실이 지닌 유사성 때문에 영화적인 분위기가 비슷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영화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
“영화에서 이야기의 핵심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세자르 자바티니
네오 리얼리즘의 저명한 시나리오 작가인 자바티니의 모토는 바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관을 대변한다. 이 아랍 시네아스트는 철저히 자신의 지역과 문화에 바탕을 두지만 이란이라는 협소한 지형을 벗어나 일반적인 삶의 미세한 결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해 보편적인 정서를 환기해 내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관객이 이미 어디선가 경험한 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보다도 현실이다. “영화를 촬영할 때에도 나를 이끄는 것은 오히려 촬영 현장 주변의 일이다. 영화가 현실적이라도 그것은 카메라 뒤의 현실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감을 주는 수많은 소재들은 나의 창안이 아니라 그저 일상을 지켜보며 얻는 것이다. 내 생각에 영화보다 중요한 것은 실재의 삶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이다. 나의 기법은 이어 붙이는 꼴라쥬와 흡사하다.”
*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문턱을 넘나들기
그렇지만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단순히 다큐멘터리적인 스타일을 지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사실과 허구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놀라운 효과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지닌 독창적인 면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영화(<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촬영하는 장면을 품고 있는 액자 구조의 영화이다. 여기서 ‘감독’의 역할을 하는 배우가 나와 카메라를 향해 자기가 이 영화의 유일한 직업 배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을 소녀 중에서 여자 주인공 후보를 캐스팅하는 장면이 뒤를 잇는다. <클로즈 업>이란 작품은 유명 감독 행세를 하다 감옥에 갇힌 한 남자를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로 시작된다. 영화는 그의 소박한 사기극을 재연하고 다시 출옥하는 그 인물이 자신이 사칭한 실제 영화 감독을 만나는 장면을 기록한다. 여기에서 어느 것이 사실이고 또 허구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관객은 이런 형식을 처음에는 낯설게 느끼겠지만 이내 키아로스타미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가 전하는 ‘진실’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나의 감정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키아로스타미는 진정한 진실의 개념을 알고 있는 드문 감독이다.
* 비 직업 배우들의 살아 있는 연기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아마도 어린이들을 비롯한 비 직업 배우들의 소박하고 생생한 연기에 있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이것은 키아로스타미의 독특한 연기 연출에 그 비밀이 있다. 그는 첫 영화인 단편 <빵과 골목길>은 집으로 가던 소년이 골목길에서 커다란 개와 마주치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개에게 빵 조각을 뜯어 주며 골목을 통과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키아로스타미는 골목 반대 쪽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소년에게 ‘개를 통과하면 자전거를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소년은 평소에 개를 무서워했다. 키아로스타미는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나 정해진 대사를 주거나 세세한 동작을 지시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기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키아로스타미는 상황을 주고 그 상황에 걸 맞는 감정을 삶의 경험 가운데서 이끌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채 카메라를 맞추고 배우들의 움직임을 쫓아 따라가며 그대로 촬영과 녹음을 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의 입장을 골프 선수에 비유한 바 있다. “공을 멀리 치고 나는 뛰어 간다. 마음 속으로 내가 목표한 구멍에 그 공이 들어가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 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기
“경계를 만드는 것이 경찰과 이민국의 업무라면 그것을 무마시키고 없애는 것은 예술가의 임무이다”
-키아로스타미
키아로스타미의 예술관은 이처럼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에 기반하고 있다. “삶의 부정적인 측면은 나를 잠 못 들게 하고 신경을 날카롭게 만든다. 나는 그 보다는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살핀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을 영화로 담는다.” 그가 생각하는 영화 감독의 이상적인 모습이란 꽃장수 같은 존재이다. 그가 꽃을 만들지는 않지만 그것을 가장 아름답게 모아 놓듯이 영화 감독 역시 삶의 아름다운 부분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현실의 모순들을 은폐하고 낙원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묘사되는 이란의 모습은 그리 매혹적인 곳이 아니다. 전근대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지진으로 생활의 터전이 파괴된 비참한 현실이 사실 그대로 보여진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한 여인을 사랑하는 후세인은 그러나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기에 그녀를 포기할 것을 강요받는다. <숙제>라는 작품에서 아이들은 아버지가 숙제를 도와주기 바라지만 대부분의 아버지가 글을 몰라 도리가 없다고 토로한다. 키아로스타미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이란의 현실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이란 누군가의 고통스런 문제를 접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 하며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 영화의 장르 구분, 리얼리즘의 개념, 내러티브의 개념, 시나리오론, 그리고 영화사, 이제는 이 모두가 다시 쓰여져야 할 지 모른다. 그것은 순전히 변방의 영화로만 인식돼 왔던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 중심의 이른바 ‘주류 영화’의 흐름을 통째로 뒤엎을 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키아로스타미로 인해 새로운 영화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 김지석(영화 평론가) : 한겨레 신문 1996년 2월 17일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완전히 무명의 감독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영화가 세계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영화가 새로운 젊음을 되찾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참과 거짓에 대한 뛰어난 변주곡을 창안하고 진정한 청춘의 욕조에 다시 몸을 담그고 있으며 매우 복합적인 이미지 읽기를 배치해 놓았다. 그의 영화는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다양한 개성을 발산한다. 키에로스타미의 작품, 그것은 바로 오늘날 가장 위대한 시네아스트의 영화인 것이다.
- Thierry Jousse : Cahier du Cinema 1993년 7/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