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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은 그 동안 영화사 백두대간과 인연을 맺었던 거장 감독 또는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기록합니다.

잉마르 베리만 - 신의 존재와 인간의 구원을 집요하게 질문한 영상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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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예술도 영화가 하듯이

우리의 감정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영혼의 어두운 방 깊숙이에 다다르지 못한다.”


- 잉마르 베리만


20세기 최고의 감독이자 신의 존재와 인간의 구원을 집요하게 질문한 영상 철학자

 

20세기 최고의 감독으로 칭송받는 잉마르 베리만은 끊임없는 미학적 혁신을 통해 시대를 앞서 나갔으며, 영화사에 손꼽히는 걸작들을 남겼다. 신의 존재, 인간의 죽음, 고통과 치유, 신앙과 구원 등 심오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룸으로써 현대 영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렸으며, 혁신적인 촬영과 편집 기법으로 후대의 감독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연극 연출가이기도 했던 그는 관습적인 영화 연출 기법에 구속되지 않고 새로운 영화 언어의 혁신을 주도했으며, 철학적, 신학적, 존재론적 질문들을 영화를 통해서 제시하면서, 신이 침묵하는 시대,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들, 그리고 예술가의 고독한 삶을 다루었다.

 

그는 칸 국제영화제 뿐 아니라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도 여러 차례 수상하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으며, 1976년에는 예술적 공헌도가 큰 문화인들에게 수상하는 괴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수상 목록으로는 <산딸기>(1957)에 수여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 7의 봉인>(1957)에 수여된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삶의 가장자리>(1958)로 수상한 칸 영화제 감독상 등이 있으며, <처녀의 샘>(1960),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1961), <화니와 알렉산더>(1983)로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세 차례나 받았다.

 

 

연극, 영화, TV를 망라하면서 방대한 유산을 남긴 스웨덴의 국보급 예술가

 

1918 7 14일 스웨덴 웁살라에서 엄격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베리만은 유년 시절의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냈고, 아버지가 주관하는 장례식과 결혼식, 탄생의 예식 등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생과 사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또한 교회의 중세벽화에 그려져 있는 신비스러운 신과 죽음의 모습들, 악마에 사로잡혀 있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은 어린 베리만의 기억 속에 강하게 각인되어 후에 그의 작품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톡홀름 대학에 입학한 베리만은 문학과 예술사를 공부하다가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어 연극 무대에서 연출가로 활약한다. 1944, 그는 당시 유명한 영화감독인 알프 훼베리의 영화 <고통>의 각본을 쓰면서 영화계에 진출하게 된다. 1946년에는 데뷔작 <위기>를 발표하고, 이후 군나르 피셔라는 촬영감독을 만나 이 시기의 대표작인 <감옥>을 내놓는다. 1940년대의 베리만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연극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작품들로 연극적인 특성들을 한껏 반영하고 있다.

 

1950년대에 들어와 베리만은 본격적으로 영화 작업에 몰두, 대중에서 지지받는 작품들을 꾸준히 양산해 낸다. 그의 열여섯 번째 작품인 <한 여름밤의 미소>는 연애담을 희극장르로 연출한 영화로, 독특한 ‘시적 유머’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베리만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 7의 봉인>신의 부재, 인간의 구원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심도있게 다룬 작품으로 이 작품으로 세계 영화사의 한 획을 긋게 되며, <산딸기>는 베리만 특유의 내면적 심리상태, , 무의식, 공포 등을 초현실주의적인 수법을 통해 표현한 작품으로 시간, 공간의 파괴를 시도해 주목을 받았다.

 

‘신의 3부작’으로 알려져 있는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겨울빛>, <침묵>은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 신의 존재여부를 질문하고 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다른 사람과 교감하지 못한다, 인간은 신과 사랑을 다 필요로 하지만 결국 둘 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3부작을 마감하는 <침묵>에서 감독은 “과연 신은 침묵하고 있다.”는 말로 끝맺는다. 이후의 작품 <페르소나>, <늑대의 시간>, <치욕>은 그의 두 번째 3부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들은 현실세계에 있어서 예술가의 좌절과 예술의 무기력, 그리고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를 탐구한 작품들이다.

 

그는 1968년 ‘시네마토그라프 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를 설립하고 <결혼의 풍경>을 발표하여 광범위한 대중적 성공을 얻는다. 그러나 1973년 베리만은 그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는 커다란 사건을 맞게 된다. 연극 공연 중에 경찰이 찾아와 그를 탈세혐의로 체포해 간 것이다. 그 후로 베리만은 조국 스웨덴에 대한 불신감과 실망으로 인한 깊은 딜레마에 빠져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뮌헨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197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든다. 이 시기의 작품들로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영화화한 오페라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불리 우는 <마술 피리>, 그리고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뱀의 알>등이 있다.

 

1978년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 베리만에게 스웨덴 정부는 백배 사죄했으나 그는 쉽게 용서하지 않았고, 결국 몇 년 후에 베리만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베리만 상’을 제정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분노는 가라앉았다. 그 후로 정부는 매년마다 스웨덴의 우수한 젊은 신인 영화감독을 선발하여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 후 베리만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영화, <화니와 알렉산더>(1982)를 만든 후 다시는 영화를 하지 않겠노라고 공식 선언을 한다. 2003<결혼의 풍경>의 속편이자 TV용 영화였던 <사라방드>를 만들었으며, 2007년에 발틱해 연안 포뢰 섬의 자택에서 8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후대 감독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네아스트

 

잉마르 베리만은 동시대 그리고 후대의 감독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세계 영화계를 움직이고 있는 대표적인 시네아스트들 중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하는 감독들 중에는 우디 앨런, 라스 폰 트리에, 이안, 페드로 알모도바르, 기예르모 델 토로 등이 포함되며, 스탠리 큐브릭,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로버트 알트만, 크쥐시토프 키예슬롭스키, 에릭 로메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이 그의 영화 세계를 극찬한 바 있다.

 

¨  “베리만은 현대 유럽 영화의 가장 독창적인 작가이다.” 장 뤽 고다르

 

¨  베리만은 종교, 죽음, 실존주의 등의 형이상학을 스크린에 옮겨온 최초의 감독이다.” –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  "영화에 대한 새로운 지평... 인간 의식의 심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  그의 영화들은 영화사의 거대한 등대로서 그 자체로 서 있다.” – 빔 벤더스

 

¨  "심오한 질문을 제기하는 정신, 두려운 존재에 대한 도전, 내면의 성찰" – 이안

 

 

 

Filmography

1946 <위기> | 1953 <모니카와의 여름> | 1955 <한 여름밤의 미소> | 1957 <7의 봉인><산딸기> | 1958 <삶의 가장자리><얼굴> | 1960 <처녀의 샘> | 1961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 1963 <겨울빛><침묵> | 1966 <페르소나> | 1968 <늑대의 시간><수치> | 1969 <열정> | 1972 <외침과 속삭임> | 1973 <결혼의 풍경> | 1975 <마술 피리> | 1978 <가을 소나타> | 1982 <화니와 알렉산더> | 2003 <사라방드>

 

 

연보 TIMELINE

잉마르 베리만 Ingmar Bergman, 1918-2007

 

1918 | 스웨덴 웁살라에서 에른스트 잉마르 베리만 7 14일 탄생

1938 | 스톡홀름 대학 입학, 매스테르 올로프스고르덴 극단에서 첫 연극작품 <외항> 등 공연

1940 | 스톡홀름 대학 자퇴, 셰익스피어 <맥베스>와 스트린드베리 <펠리컨> 연출

1943 | 스벤스크 영화사 시나리오 부서 입사

1944 | 첫 시나리오 <고통>이 알프 훼베리 연출로 영화화됨, 헬싱보리 시립극장 대표로 임명됨

1946 | 데뷔작 <위기>, 두 번째 작품 <우리의 사랑에 비가 내린다/우산을 든 남자> 개봉

1948 | <기항지> 개봉

1952 | 말뫼 시립극장으로 임명

1953 | <모니카와의 여름> 개봉, 스벤 닉비스트와 작업 시작

1955 | <한 여름 밤의 미소> 개봉, 칸 영화제 첫 경쟁부문 진출

1957 | < 7의 봉인> 개봉,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1958 | <산딸기>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

1958 | <삶의 가장자리> 로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1960 | <처녀의 샘> 개봉,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수상

1961 |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개봉,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수상

1963 | <겨울빛> <침묵> 개봉, 스톡홀름 왕립극장 대표 임명

1966 | <페르소나> 개봉, 스톡홀름 왕립극장 사임, 포뢰 섬에 집을 지음

1968 | <늑대의 시간> <수치> 개봉

1971 | 첫 영어 영화 <접촉> 개봉

1972 | <외침과 속삭임> 개봉

1973 | <결혼의 풍경> 스웨덴 TV에서 6부작 주간극으로 방영

1975 | <마술 피리> TV 방영, 스톡홀름 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

1976 | 스트린드베리 <죽음의 춤> 공연 연습 중 탈세 혐의로 체포, 자진 망명 형식으로 스웨덴을 떠나 독일 뮌헨 레지덴츠 극장과 계약

1977 | <뱀의 알> 개봉, 오슬로에서 <가을 소나타> 촬영 시작

1978 | <가을 소나타> 개봉

1979 | <화니와 알렉산더> 시나리오 집필 시작, 탈세 혐의 벗음

1982 | <화니와 알렉산더> 개봉, 극장용 영화 은퇴 선언, 이후 TV영화 연출

1984 | <화니와 알렉산더> 아카데미 최우수 촬영상 등 4개 부문 수상

1986 | 자서전 <마법의 등> 완성

2003 | 마지막 TV 영화이자 <결혼의 풍경> 속편인 <사라방드> 방영

2004 | 연극무대 은퇴 선언, 회고록 <3개의 일기> 출간

2007 | 730일 포뢰섬 자택에서 잠들어 있던 중 평화롭게 숨을 거둠